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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문

김민지 0 1,188 2016.01.24 08:01
보잘것 없는 나를 품어 주신 하나님! 1969년 음력 4월 5일, 통영의 어느 교회당 옆 허름한 초가집에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온 동네에 울러 퍼졌다. 나의 어머니는 30대 중반 즈음, 늦은 나이에 다섯 살 먹은 오빠를 데리고 재가(再嫁)를 해 들어가 나를 낳은 것이다. 다섯 살짜리 오빠의 아버지는, 제주도 금광굴에 들어갔다가 광산이 무너지면서 실종이 되었고,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다가 이웃 사람의 소개로 아이가 셋이나 되는 집에 살림하러 들어간 것이다. 그 집에는 18살이나 된 제법 처녀티가 나는 맏딸이 있었고, 그 맏딸은 그렇게 자기네 살림을 꿰찰 낯선 여자에게 곳간 열쇠를 건네준다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갓 태어난 나는, 날 때부터 천덕꾸러기였다. 끼니를 얻어먹지 못한 어머니는 나에게 줄 젖이 모자랐단다. 나는 점점 말라 갔고, 어머니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 했기에 갓 태어난 나를 둔 채 그 집을 나와야만 했단다. 자신이 살아야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생각에…. 태어난 지 7일쯤 되었을 때, 나는 젖을 먹지 못해 뼈가 앙상해져 갔고, 안타까워하며 지켜보던 이웃 아주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다시 엄마 품에 어렵사리 안길 수 있었다고 한다. 피골이 맞닿아 말라버린 나는 그나마 밥벌이 수단으로 좌판을 시작한 어머니로 인해 연명할 수 있었단다. 어머니는 해방 무렵(12세)부터 친정집 건넌방에 새 들어 살던 선교사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남편의 생사마저 모르는 혹독한 현실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밖에 의지할 수 없었던 독실한 기독교인 이였다. 좌판을 하면서도 새벽기도, 밤샘기도, 수요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갔고, 우리도 자연스레 교회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며 어린 시절을 교회에서 보내곤 했단다. 그렇게 성장해 중학생이 되었고, 어느 날 등교준비를 하다말고 배가 아파지기 시작해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방바닥을 구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놀란 어머니는 나의 배를 이곳저곳 만져보며 아프다는 곳에 손을 대고 기도했고, 어머니는 "맹장염 같은데 병 고치는 목사님께서 이웃교회에 와 계시니 배에 칼을 대지 않고 치료하실 수도 있을 거다."라며, 나를 달래어 둘러업고 이웃교회로 향했다. 목사님 앞에 나를 눕혀 놓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 목사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너 귀신이지" "너 몇 살이야." "너 남자야 여자야" 하며,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들만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아픈 배를 움켜잡고 빨리 병원에 데려달라고 했고, 목사님은 낫게 해줄 테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목사님의 얘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으로 갔다. 맹장염이 복막염이 되고 촉박해진 시간임에도 수술을 강행하여 생명은 건졌지만, 그 이후로 나는 교회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그 목사님은 사기 전과가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상처가 깊어진 나를 위해 새벽기도로 철야 기도로 금식기도로 내 맘을 돌려보기 위해 불철주야로 기도하고 설득했지만, 나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출가를 하였고, 시집가서 첫 아들을 낳았다. 때마침 온나라가 한보사태로 경제위기가 닥친 때라, 남편이 하던 사업체도 어려운 위기를 면치못했다. 가세는 기울어 결국 거리에 좌판을 놓고 연명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홀어머니와 오빠와 셋이서 살아올 때도 초등 6학년 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그 일이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 벌어 아이의 우유와 끼니를 때울 양식을 사서 근근이 생활을 했지만, 등에 업힌 아들로 인해 우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외장을 다녔는데, 그들과 함께 탔던 트럭이 마주오는 오토바이가 중앙선을 넘어오는 대형사고를 당한 것이다. 사고를 낸 사람은 맥주 6병을 마시고 친구의 오토바이를 몰래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터라 아파도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형편이었다. 그날은 매일같이 함께 나섰던 나는 그날따라 아들 아이가 새벽부터 열이나고 토하는 통에 함께 가지 못해 남편만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미 택함 받은 나에게 성령님의 손짓이 계셨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함께 외장을 다녔던 할머니는 우리 내외에게 입버릇 처럼 교회를 나가자고 했었다. 사고가 나기 며칠 전만해도 우리에게 교회를 나가자고 권유를 했었다. 내 맘 속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물려 받았던 신앙의 씨앗이 남아있었지만 아직은 NO였다. 사고 당시 천만다행 인것은 뱃 속에 6개월 된 딸아이가 있었고, 함께 갔었더라면 정말이지 큰 비극적인 결말이 났을 사고였다. 그 일이 마무리 되고 남편의 몸도 어느정도 회복될 시기에 둘째를 출산했고, 외장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안동 수상동에 저렴한 셋방을 얻었다. 안동에서 생활을 하며 다시 거리에서 이것저것 장거리를 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때, 손님으로 오시던 모 은행 지점장 님의 사모님이 늘 내가 파는 물건을 자주 팔아주었고, 뙤악볕에서 숮불 김을 구워파는 내게 얼음을 동동 띄운 화채를 가져다 주기도 하며, 어려운일이 있으면 상의 해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처를 주고 가기도 하였고, 얼마 후엔 집에 초대를 해서 근사한 저녁상을 차려 주기도 했다. 지점장님은 장로님이셨고, 사모님은 권사님이셨다. 우릴 전도하려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고, 우린 교회를 나가기로 작정을 하고 옥동에 있는 모 교회에 등록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후 장로님은 서울로 발령받아 그곳으로 이사를 가시고, 다시 흐지부지 되어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시 반갑지 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2001년 4월 2일, 오래된 한옥이라 그런지 세 들어 살고있던 방에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두 아이가 놀던 방에서 불이 번지기 시작했고, 남편은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을 뚫고 들어가 딸아이를 구조했고, 4살 짜리 아들 애는 조그마한 광창을 막아뒀던 비닐이 불길에 녹아 빛이 새어들어 오는 것을 통로로 알았던지 그곳으로 스스로 뛰쳐나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네 식구가 살고있던 방이 완전히 전소되어 버렸다. 불이나기 며칠 전에 남편은 주일날 교회 갈 것을 권유했었다. 나는 경제적인 이유를 핑계로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어물정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 사고로인해 아이들만 홀로 집에 두는 것이 두려워, 어렵사리 모은 얼마 안되는 돈으로 남편이 입버릇 처럼 얘기하며 하고 싶어 했던 국밥 가게를 시작하기 위해 점포를 얻었다. 2002년 3월 2일, 불모지나 다름없는 안동에선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3살과 4살 짜리 어린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12평 남짓 되는 작은 가게에 탁자 4개를 놓고 배달을 해 가며 장사를 시작했다. 첫 날 부터 장사는 꽤 잘되었고, 단골 손님도 꾸준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 당시 세를 주고있던 가게를 관리하는 소장님이 계셨는데, 그 가게를 포함한 50여곳을 당시 설 집사님(현재는 설 권사님)이 관리를 하셨었다. 어느 날인가 소장실에 문의할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성경을 읽고 계신 모습을 보고 도원교회로 따라 나오게 되었다. 언젠가는 교회를 나갈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남편이 소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이라 빚이 꽤나 있었고 조금이라도 빨리 빚을 갚겠다고 주일은 1부 예배를 드리고 영업을 했다. 그러던 중 믿음이 부족한 탓인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법으로 선택을 하다보니 일이 계속 어긋나기 시작했다. 안동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구미에 가게를 얻어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 가게 주인은 이삿짐이 오기전에 솥을 먼저 걸어 놓으라고 가르쳤다. 우린 이왕이면 하는 생각으로 솥단지 하나만 딸랑 싣고 이사갈 가게에 걸어두고 와서, 며칠 후 다시 온가족이 삶의 터전을 구미로 옮겨갔다. 3개월을 그곳에서 보내며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안동으로 오게되었다. 간혹 안동으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내외를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를 알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안동 경찰서 뒷 골목에다 배달만 할 생각으로 조그맣고 싼 가게를 얻어 테이블 두 개를 놓고 2004년 5월 21일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6월 21일 오전 10시경에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시장을 보러 나갔다가 마주오는 음주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어오는 사고를 당했다. 구미서 빈손이 되었기에 다시 빚 위에 빚이 얹어져 있었고, 음주 운전자는 세 번의 음주 사고를 내어 무면허인 데다가 무보험이고 그 전에 낸 사고를 수습도 못한 상태였다. 우리도 그때 자동차 보험이 그날 새벽 12시까지 만기라서, 치료조차도 불안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다. 사고가 나기 이틀 전 남편은 주일을 성수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배달 일을 하니 몸도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주일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갚아 나가야하는 빚들이 있어서 하루를 쉬는게 겁이났다. 좀더 빚을 갚아놓고 주일을 지키자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주일날 영업을 강행했던 것이다. 그담날 아침 재료를 준비하다 재료 한 가지가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가기위해 나서려는데, 비가 뚝뚝 떨어져서 남편에게 차를 타고 갖다 오라고 했다. 10분도 되지 않을 거린데, 4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40분도 훨씬 지나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병원으로 오라는 말에 기진맥진 할 지경이었다. 또다시 사고라니 어처구니 없다는 말이 딱 맞을 것같았다.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은 '나를 버리시나이까' 가아니라, '나를 이토록 사랑 하시나이까' 였다. 그렇게 교회를 핍팍하고 등돌리려 하는 나를 왜 셀 수 없는 고난을 통해 깨달게 하시는지 그제서야 알것 같았다. 6월 21일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선 도무지 우리 두 사람의 인생 스토리는 엮어지지 않는 삶들 이었다. 집세가 10개월이나 밀렸고, 무릎 분쇄골절로 인해 깁스를 하고 있어서 가게운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사고로 인한 고난이 우리에겐 축복이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 안될 고난이 축복! 하나님의 방식! 우린 그걸 체험했고 믿고있다. 2004년 6월 21일 이후 주일성수는 필수였다. 우리가 교회 나가기 시작한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다. 목사님의 양육을 받고 모든 게 말씀대로 행하려는 삶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영업시간도 수요일과 주일을 맞춰서 정하였고, 가게엔 주류판매를 하지 않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불행의 연속이었던 내 삶은 술이 치료제였고 현실에서 도피할 피난처였다. 우리 두 내외는 2004년 10월과 12월부터 각각 성가대를 시작했다. 성가대를 서는 순간부터 어제저녁까지 술에 의지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말씀에 의지하고 말씀이 양식인데 강단과 나란히 앉은 내 모습이 술로 인해 부끄러워진다면 예배자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술은 멀어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가게에도 술을 없앴다. 우리가 당한 두 건의 교통사고가 음주 운전자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술의 최후는 절망이고 패망이라는 걸 알 것 같았다. 영육이 강건해지는 말씀 속에서 해답을 하나씩 찾아갔다. 남편은 질문거리가 생길 때마다 주일 날 목사님의 말씀 속에서 해답을 찾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였다고 한다. 2004년 하나님께서 품어주신 우린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2008년도에는 비록 대출로 장만했지만,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될 살림집이 딸린 가게를 얻었고, 재작년 우연히 등단을 하기도 했다. 함께 자랐던 오빠는 현재 부산에서 중등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고, 그 오빠는 장편소설을 여러 권 출판했던 소설가이기도 하다. 오빠에게 검증받아 대한문인협회에 시 다섯 편을 응모했는데, 그것이 당선되었던 것이다. 작년엔 첫 시집을 출간하는 기쁨도 있었고, 또 연말에는 그 시집이 등단한 문단에서 출간한 시집, 십여 권 중 베스트설레 라는 명예로운 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가게는 광고도 한 번 한 적이 없지만, 늘 손님들로 북적였고, 목사님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처럼,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거와 주부와 설거지하는 거완 차이가 없다고 하셨던 것처럼, 남편은 국밥 한 그릇 퍼 나르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교회에 데려다 놓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 가게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릴 수 있는 복음의 통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오늘도 열심히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양육 받는 어린양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다. 저의 간증문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쓰러지고 또 쓰러져 만신창이 빈털터리의 모습으로 주님께 왔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기다리셨고 반가이 맞아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분의 섭리였음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엄마의 새벽 김 민 지 바스락 바스락 엄마의 새벽이 시작되는 소리 잠결에 엄마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빼꼼이 눈을 뜨고 엄마의 숨 죽인 속삭임을 엿듣는다 엄마는 한참동안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 기쁜일 슬픈일 힘들고 어려운일 모두 하나님께 고백한다 사그락 사그락 엄마의 성경 읽는 소리 내가 잠에서 깰까 조심조심 책장을 넘긴다 어느새 창 밖은 하루의 1막이 열리 듯 어둠을 걷어내면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조명을 밝힌다 엄마는 시간를 확인하고 성경을 덮고 교회로 향한다 엄마의 새벽은 일상 중에서도 유일한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이었다 지금은 엄마가 꿈에서 보았다던 아름다운 천국의 낙원에서 하나님과 매일매일 대화를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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