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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 글입니다.

류명희 0 903 2010.12.08 11:12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만든 “아바타”라는 영화가 지난 8월에 전 세계 동시 개봉되었지요. 개봉 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온 이 영화는 모든 흥행기록을 단번에 갈아치웠습니다. 이 영화는 지하자원을 얻기 위해 판도라 행성을 과학으로 정복하고 그 숲을 파괴하려는 “지구인”과 그 생명의 숲과 소통하며 더불어 생활하는 “나비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입체영상으로 보여줍니다. 지구에서는 더 이상 에너지 자원을 얻을 수 없다. 최첨단 무기를 앞세워 우주로 떠나자! 행성을 정복하자! 이런 슬로건은 오늘날 우리 지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20년 후면, 지구의 석유자원은 고갈된다고 하지요. 상상할 수도 없는 현실이 불 보듯 뻔합니다. 이 영화를 본 평범한 관객들은 이상하게도, 아무도 지구인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대신 꼬리가 달린 “나비족”을 편듭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원 정보를 수집하는 사명을 위해 판도라 행성 안에 자신의 분신(아바타)을 침투시킨 전 해병대원 “제이크”가 “나비족” 여인과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 때문입니다. 과학 무기로 행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지구인”을 향해서는 그 어떤 감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소통하는 “나비족”을 향해서는 가슴 짠한 감동이 일어납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요. 얼마전만해도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지요. 구멍가게는 누구의 집에서도 걸어서 3-4분되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구멍가게 안에는 엉덩이가 푸짐한 아주머니가 자리 잡고 있거나, 아니면 안경 낀 할아버지 같은 아저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사람의 자리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대화가 있는 자리, 정이 있는 자리입니다. 소통이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관계가 있는 자리입니다. 바로 사랑의 자리입니다. 문을 열면서, 아주머니! 응, 응 철수네, 어머니 잘 계시냐! 할머니 몸은 괜찮니! 네 좀 좋아졌어요. 뭐가 필요해서, 네, 라면요. 라면 저기 있어. 얼마요. 응, 200원, 여기 있어요. 아니면, 우리 집 장부에 적어 놓으세요. 그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 이제 대형마트를 한번 가 보세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 역시 자리를 잡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부릅니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습니다. 손 가는 대로 물건을 집어, 카트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채웁니다. 견고하게 자리 잡은 계산대에 주섬주섬 내려놓습니다. 카드를 내밀고, 계산합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사람과 사물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돈만이 오고가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자리입니다. 무정과 무심의 자리요, 단절과 불통의 자리입니다. 욕구의 자리입니다. 사물의 자리입니다. 대형 마트를 가면 정보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情)은 얻지 못합니다. 사물을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랑은 얻지 못합니다. 대화(“대”놓고 “화”내는 일)는 쉽게 일어나지만, 진심이 통하는 대화(對話)는 참 어렵습니다. 대형마트에서는 감정을 숨길 수 있는 법은 배울 수가 있어요. 그러나 감사는 언감생심, 절대 못 배웁니다. 사물과의 관계는 아주 노련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는 털끝만큼도 맺을 수는 없습니다. 사물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작품입니다. 비록 외계인과의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에 마음이 동하고 가슴이 찡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원하고, 정을 원하고, 감사를 원하고, 대화를 원하고, 소통을 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원하면서도,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대형마트와 같은 교회, 대형마트와 같은 삶, 대형마트와 같은 가정, 대형마트의 경제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형마트로 상징되는 효율과 능률, 효능과 효과를 우선 생각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효율을 먼저 따지고, 사랑도 효율로 여깁니다. 심지어 교회 봉사, 전도, 섬김까지도 효율과 효과를 우선 고려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대를 사랑을 잃어버려, 인간관계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합니다. 물론 효율과 효과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지요. 우선이 아니요,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고, 골똘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생각의 힘이 부친다면, 먼저 생각의 힘을 키워야 하겠지요. 사람과 사물, 사랑과 사용 이 단어들의 첫음절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조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그 뜻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사람은 피가 돌고 마음이 있고, 정이 있고 삶이 있고, 꿈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물은 우리의 몸과 삶을 편리하게 안락하게 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깝지 않는 헌신이요, 섬김이요. 책임입니다. 무한정, 끝이 없습니다. 사용은 주지 않고 늘 쓰기만 합니다. 유통기간이 있습니다.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은 사랑하고, 사물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람을 사용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불행은 사람을 사용하고, 사물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떠맡은 고통이 있는가? 아니면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사용해서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가? 내가 떠맡은 고통으로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는가? 아니면 나의 편리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있는가?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안위와 편리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사람은,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강을 위하여 고통을 떠맡는 사람은 사람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사물을 사랑하는가? 사람을 사용하는가? 사물을 사용하는가?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물을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물을 사랑하는데 사람을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은 매일, 매사에 점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하나님, 사람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바냐3: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로 인하여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그 기쁨을 이길 수 없을 정도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나로 인하여 너무 즐거워서 노래를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물로 취급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의 재산목록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재산 목록을 보면 언제나 소 10마리, 양 50마리, 노비 30마리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애급 사람들에게 있어 이스라엘 사람은 사물이었기에 자신들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으로 대우했습니다. 사람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결과 직접 애굽 땅으로 내려가서 건저내십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킵니다.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로 대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데, 홍해, 광야,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 불기둥, 구름기둥 천지만물을 다 사용하십니다. 모든 사물을 다 사용하십니다. 교회주보 안에 지난 주 통계, 사람 숫자를 넣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사물로 취급해서 몇 명이 왔다. 불었다. 줄었다 그런 의미로 숫자를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재산목록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사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책 안에 누가 빠졌나, 사람 목록 안에, 내 교구, 내 구역 식구 가운데 오늘은 누가 빠졌나, 그 빠진 사람을 찾아가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무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가는 주님의 마음으로 내가 찾아가야지, 내가 어깨에 메고 와야지. 이런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숫자를 기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숫자 기록은 빼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세상살이가 갈수록 힘든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사물을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기계와 물건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역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사물을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사용할 때, 나라는 난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사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나라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섬기는 관계를 더 중히 여길 때, 교회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여러분, 사물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면, 짐승처럼 사나워집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사물을 사용하다보면 사랑스러워집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사물을 사용한 땅에서 어떤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물을 사용함으로 삶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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